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묜 티모셴코 (문단 편집) === 전후에서 사망까지 === 전후엔 벨로루시 군관구(1946년 3월), 남부 우랄 군관구(1946년 6월), 벨로루시 군관구(1949년 3월)의 사령관이 된다. 티모셴코의 경우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전쟁 때는 용맹한 장성이 좋더라도, 평시엔 온순한 장성이 좋다는 [[높으신 분들]]의 정서는 똑같으신가 보다. 티모셴코보다 훨씬 공을 많이 세웠던 주코프는 성격이 불같고 오만하여 원래부터 적이 많은 데다가 정치적인 야심도 의심받았기 때문에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직을 맴돌았다.[* 전쟁 후 이름을 날리던 원수들은 당의 견제를 받아 요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한직을 맴돌았지만(사실 [[문민통제]]의 원칙으로 보면 이렇게 군인이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는 게 맞다. 소련도 2차 대전 이후 군부의 힘이 너무 세졌지만, 독재자 스탈린 앞에서는 강력한 군부도 어쩔 수 없었던 듯), 희대의 똥별 [[그리고리 쿨리크]]를 제외하면 처형당한 원수는 없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머문다. 1960년 4월, 명예직인 국방부 고문관에 임명되었으며, 1961년에 소련 참전용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전쟁 후엔 평탄히 살다가 197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다른 원수들과는 달리 회고록은 남기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맏딸 예카테리나 티모셴코가 스탈린의 차남인 [[바실리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이기도 했다. 그것도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결혼했다는 점에서는 스탈린의 신임은 없어졌지만, 인간적으로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듯 하다. 하지만 3년만에 이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